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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공부/티소믈리에 공부

차(茶;tea)나 한 잔 할까요? - 차의 역사와 정의

by HEEHEENE 2020. 12.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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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나 한 잔 할까요?"

예전에는 이런 말로 헌팅을 시도하기도 했다. 물론 이 말에는 실제 '차(茶)'라는 의미보다는 당신의 시간을 얻고 싶습니다겠지만 당신이 없는 나는 '차(茶)'에만 집중하기로 한다.

 

차(茶)는 무엇인가?

1. 차나무의 어린잎을 달이거나 우린 물

2. 식물의 잎이나 뿌리, 과실 따위를 달이거나 우리거나 하여 만든 마실 것을 통틀어 이르는 말. 인삼차, 생강차 등

3. 식물= 차나무

차와 대용차

차나무에서 나온 잎으로 만든 제품과 이를 우려내서 만든 음료를 '차(tea)'라고 하며 차나무의 잎이 아닌 식물을 이용해서 만든 차를 한국에서는 '대용차' 서양에서는 '인퓨전(infusion)'이나 '약탕(tisane)'이라고 지칭한다. 좀 더 까다롭게 구분하는 이는 '허브티'라는 용어도 '허브인퓨전'이라고 해야만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뭐가 이렇게 까다로운지 모르겠지만 이 까다로운 차의 시작부터 알아본다.

 

 

차의 시작 중국

 

차는 중국에서 부터 시작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기원전 2500년 경 중국의 신농이 다양한 식물의 독성과 약성을 평가하는 중, 독에 중독되었고 마침 찻잎이 끓는 물속에 떨어져 있었다.  이 찻물이 향기로워 찻물을 마시고 해독이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달마도

또 다른 전설은 인도의 왕자였던 달마대사가 출가해서 중국 허난성에서 9년간 잠을 자지 않고 면백 수행 도중 깜박 잠이 든 것에 화가 나서 자신의 눈꺼플을 베어 던졌다고 한다. 여기에 나무가 자라서 눈꺼풀같이 생긴 잎이 자랐다. 이 잎을 뜨거운 물에 우려서 마셨더니 정신이 맑아지고 잠이 달아났다고 한다.

이 두 가지 설화가 모두 정확한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한 점은 차는 꽤나 오랜 시간 전부터 음용을 하기 시작했으며, 기호식품이기보다는 약용으로 사용했고, 승려들에게서 수행의 도구로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약용으로 사용되던 차는 당(唐) 나라시대에 음료로 인기를 얻어 찻집이 생기고 '다경(茶經;육우 저)'이라는 차에 관한 서적도 만들어진다.

송나라 때에는 차 마시는 과정을 의식화되면서 심지어 누가 더 맛있게 차를 우려내는지 겨루는 '투차'라는 풍습도 있었고, 이 당시 차를 만드는 방법과 우려내는 방법이 일본의 유학승에 의해 일본에 전래되어서 일본의 '차노유'의 기원이 되었다.

녹차만 있었던 시절에서 명대의 16세기 말경 부터 홍차, 청차, 백 차등 다양한 차들이 생산되었다. 

 

 

한국에서의 차

 

우리나라에서 차의 기원은 가야의 왕 김수로의 배필이 된 인도 아유타국 공주인 허황옥의 혼수품 중 하나가 차나무였고, 이 것이 김해지역 차 재배의 시작이라고 한다. 신라 흥덕왕 3년의 당나라에 다녀온 사신인 대렴이 차의 종자를 들여와서 지리산에 심었다고 한다. 한반도에서도 불교의 행사인 연등행사에서 차를 하사하고, 대형 사찰에서 '다촌'을 두어 차를 전문적으로 생산했었다. 조선시대에 숭유억불정책으로 사찰의 재정이 나빠지면서 차밭의 관리 소홀과 1480~1750년의 소빙기에 차밭은 더욱 상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청나라에 보내야 하는 공물의 양이 늘어나면서 차에 대한 세금을 크게 늘렸다. 그러면서 '차례(茶禮)'에 차를 사용하는 문화가 사라지고 술을 대신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차의 명맥이 끊기게 되었다.

소빙기 이후 기후가 좋아지고, 다산 정약용과 초의선사의 노력으로 '동다송'을 집필하는 등 차문화가 복원되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으로 인해 전통차에 대한 공백이 생겼다. 

 

 

일본에서의 차

 

말차로 유명한 일본의 차는 1191년 승려인 에이사이가 송나리에서 불교 유학 후 차나무 종자를 들고 와서 교토의 외곽에 심으면서 시작되었다. 송나라에 유행했던 차 마시는 방식은 찻잎을 쪄서 덩어리화 해서 갈아서 '격불'을 해서 마시는 '점다법'이었다. 그 당시의 원형을 유지하면서 '차노유'로 발전시켰다. 요즘으로는 말차이다.

17세기에 중국의 승려인 은원에 의해 '포다법'(현재 차 우리는 방식)을 알렸으나 당시에는 인기가 없었다. 찻잎을 쪄서 유념하는 '센차'를 개발하면서 에도 지역부터 인기가 얻었다. 1859년 요코하마항을 개항이 후 중국의 불균형 무역에 불만이 많았던 국가들이 일본의 차를 수입하기 시작했다. 수요가 늘어나면서 일본은 차의 재배와 생산을 자동화를 발전시켰다. 

 

 

대만에서의 차


대만은 16세기 포르투갈어로 '포르모사'(아름답다)로 불리며 소개되면서 대만의 차를 '포 모서'라 부른다. 1796년 푸젠성에서 차나무를 가져와서 재배를 시작했다. 하지만 실제로 상업적인 생산은 1820년부터 상업용 재배종을 들여와서 재배했다. 1858년 청과 영국 사이 텐진 조약 이후로  차 생산의 80%를 수출을 해오다 본토와의 녹차, 홍차의 경쟁이 심해지면서 1970년대부터는 최고급 청차를 생산하면서 내수로 전환을 했다. 그래서 현재도 최고의 우롱차 생산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서양에서의 차

 

17세기부터 포르투갈과  네덜란드에 의해 동양의 다기와 차가 수입이 되었다. 영국에서는 청교도혁명으로 찰스 2세가 추방을 당하고 얼마 후 다시 왕정이 복권된 후 포르투갈 공주 캐서린과 결혼을 하면서 네덜란드를 견제하려 하였다. 이때 캐서린은 결혼 지참금으로 많은 양의 설탕을 가져왔고 더불어 차와 다구를 소개하면서 귀족들에게 유행하기 시작했다. 이후 차가 대중화되면서 수입량은 증가하게 되면서 중국과의 무역에서 적자를 보게 된다. 그래서 식민지에 과도한 세금을 부여했고 그중에 '보스턴 차 사건'은 꽤 유명한 독립운동의 계기가 된다. 중국과의 무역적자에 영국은 아편을 밀매하기 시작했고 청나라는 아편을 몰수해서 소각한다. 영국은 자국 상인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선전포고를 하고 '아편전쟁'(1840~1842)에서 이기면서 불평등 조약으로 강제 개항을 한다. 

 

 

인도에서의 차

 

아편전쟁 전에 영국은 차를 재배하기 위해 자신들의 식민지인 인도에 시험재배를 하지만 실패를 한다. 1823년 로버트 브루스가 인도의 아삼 지역에서 자생종 차나무를 발견한다. 하지만 그 당시로는 쓸만한 품질로 생산하지는 못했다. 로버트 포춘이라는 사람이 중국에서 몰래 차 묘목과 씨앗, 기술 등을 가지고 와서 여러 시험을 통해 다르질링 지역에 재배를 시작했다. 이렇게 시작한 인도의 차 생산은 1887년에는 인도의 차 생산량이 중국을 앞지른다. 1930년 아삼에서 CTC제법이 개발되면서 품질이 낮은 찻잎도 활용할 수 있게 된다.

 

 

스리랑카에서의 차

스리랑카 차농장

스리랑카는 옛 지명은 실론이었다. 우리가 아는 스리랑카는 1972년에 국명이 정해졌다. 스리랑카는 원래 시나몬의 주산지이다. 네덜란드가 식민지로 점령하면서 시나몬과 커피를 재배했었다. 영국이 지배권을 얻고도 커피를 생산했으나 병충해로 커피농장이 도산하면서 차나무를 대체작물로 재배했다. 

 

 

마무리

차를 즐기는데 차의 역사까지 알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람들이 차를 마시려면 지켜야만 한다는 다도라는 것이 꼭 절대적인 영역이라기보다는 당시의 허세스러움의 흔적이라는 것을 아는 것만 해도 좋은 일이다. 차는 처음에는 약으로 인류에게 접근했었고 동양에서는 종교를 중심으로 서양에서는 왕족과 귀족을 중심으로 허세스러움으로 대중화되었다. 그 허세스러운 대중화와 제국주의가 엉켜서 세계사는 엉켜 돌아갔다.

현재는 차 때문에 지나친 세금도 없고 노예도 식민지도 없는 세상이다.

지금의 차는 어떤 의미로 미래에는 기록이 될까? 대기업의 티백 시장? 아니면 프랜차이즈 시장의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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