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칩(驚蟄) 그리고 설렁탕
올해 3월 5일 목요일은 24절기 중 세 번째 절기인 경칩(驚蟄)입니다. '놀랄 경(驚)'에 '숨을 칩(蟄)'자를 쓰니, 말 그대로 겨울잠을 자던 벌레와 개구리, 뱀 등이 천둥소리에 깜짝 놀라 깨어나는 시기라는 뜻이지요. 이 무렵이면 겨울을 호령하던 대륙성 고기압이 물러나고, 이동성 고기압과 기압골이 교차하며 날씨가 제법 변덕을 부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변덕 끝에 기온이 훌쩍 오르며 비로소 완연한 봄의 기운이 만물에 깃들기 시작합니다.

농경사회에서 절기는 곧 삶의 신호였습니다. 만물이 깨어나는 경칩은 한 해 농사를 준비하는 매우 중요한 시기였기에, 고려와 조선 시대에는 경칩 뒤 첫 해일(亥日)에 선농제(先農祭)를 지내곤 했습니다. 선농단에서 하늘에 제를 올린 뒤 임금이 직접 밭을 가는 '친경(親耕)'을 통해 농사의 모범을 보였던 것이죠.
재미있는 점은 우리가 즐겨 먹는 설렁탕의 유래가 바로 이 선농제와 맞닿아 있다는 설입니다. 일각에서는 밭을 갈던 소를 잡아 백성들과 나눠 먹었다고도 하지만, 함께 고생한 소를 그 자리에서 바로 잡았다는 이야기는 조금 야박하게 들리기도 합니다. 그보다는 제례를 마친 후 임금이 내린 고기와 뼈를 푹 고아 백성들과 함께 국밥을 나누어 먹었던 풍습이 오늘날의 '선농탕', 즉 설렁탕으로 이어졌다는 해석이 훨씬 자연스럽고 정겹게 다가옵니다.
경칩은 개구리알, 고로쇠, 그리고 조선판 발렌타인데이?
앞서 말씀드린 선농제가 열리는 올해의 '해일(亥日)'은 3월 8일 일요일입니다. 올 한 해 모두가 풍요롭기를 바랐던 옛 선인들의 마음을 담아, 이번 주말엔 따뜻한 설렁탕 한 그릇으로 '모두 부자 되시라'는 덕담을 나눠보시는 건 어떨까요?
경칩 무렵에는 갓 돋아난 풀이나 이제 막 깨어난 벌레조차 해치지 않을 만큼 생명을 귀하게 여겼다고 합니다. 하지만 정작 이 시기에 개구리나 도롱뇽 알을 먹으면 허리 통증과 건강에 좋다는 독특한 풍습도 전해 내려오지요. 물론 지금은 야생생물 보호 및 관리에 관한 법률(야생생물법)에 따라 엄격히 금지된 행동입니다. 건강을 위해서라면 개구리알 대신 가까운 병원이나 한의원을 찾으시는 것이 훨씬 현명한 선택이겠지요.

또한, 이맘때면 나무가 봄을 밀어 올리는 기운인 '고로쇠 수액'을 마시는 풍습이 있습니다. 예로부터 위장병과 성인병을 물리친다고 전해졌는데, 실제로도 고혈압, 피부미용, 비뇨기 계통 등에 효능이 있다고 알려져 현대인들에게도 인기가 좋습니다.흥미로
운 점은 경칩이 '조선판 발렌타인데이'였다는 사실입니다. 당시 연인들은 가을에 미리 주워둔 은행나무 열매를 이날 서로 주고받으며, 암수가 서로 마주 보며 열매를 맺는 은행나무 주변을 돌며 사랑을 확인했다고 합니다. '꼼냥꼼냥' 사랑을 속삭이던 그 시절의 풋풋한 풍경이 오늘날의 초콜릿보다 더 낭만적으로 느껴지지 않나요?
경칩에 어울리는 자스민 녹차
그렇다면 만물이 기지개를 켜는 경칩, 이 계절에 가장 잘 어울리는 차는 무엇일까요?
모든 것이 새롭게 깨어나는 시기인 만큼 정신을 맑게 깨워줄 선명한 향기가 필요합니다. 또한, 경칩 하면 떠오르는 청개구리의 싱그러운 초록빛 이미지도 놓칠 수 없지요. 그래서 제가 선택한 올해 경칩의 차는 바로 ‘자스민 녹차’입니다.

사실 우리가 마트에서 흔히 접하는 녹차원이나 피코크(PEACOCK)의 자스민티는 대개 우롱차 베이스인 경우가 많습니다. 자스민 우롱은 우려내는 온도에 크게 구애받지 않고, 특유의 난향과 자스민 향이 조화로워 그 나름의 매력이 충분합니다. 하지만 오늘은 조금 더 파릇하고 섬세한 기운을 느끼고 싶어 ‘자스민 녹차’를 준비했습니다. 일반 매장에서는 의외로 찾기가 쉽지 않아 특별히 온라인으로 공수해 보았습니다.
제가 고른 차는 독일의 유서 깊은 브랜드, 로네펠트(Ronnefeldt)의 자스민티입니다. 독일 브랜드이지만 찻잎 자체는 고품질의 중국산을 사용했는데요. 이 차가 품고 있는 향과 맛을 지금부터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로네펠트 자스민 티


티백 하나에는 약 1.5g의 찻잎이 담겨 있습니다. 베이스가 되는 중국산 녹차에 향긋한 자스민 꽃향, 그리고 이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줄 가향이 더해진 블렌딩 티입니다.
로네펠트에서 권장하는 레시피는 80도의 따뜻한 물 200ml에 티백을 넣고 2~3분 정도 우려내는 것입니다. 녹차는 우롱차와 달리 끓는 물을 바로 부으면 떫은맛이 강해질 수 있어, 한 김 식힌 물을 사용하는 것이 포인트입니다.



온도계가 없더라도 온도를 맞추는 간단한 방법이 있습니다. 끓인 물을 다른 잔에 한두 번 옮겨 담기만 해도 온도가 자연스럽게 80도 근처로 떨어집니다. 티백 안의 내용물을 살짝 살펴보니, 일반적인 잎차 형태보다는 빠르게 우러날 수 있도록 잘게 가공된 검은 빛깔의 녹차가 담겨 있습니다.
자스민 녹차 시음평: 입안에 머무는 연보라색 봄의 향기

- 수색: 찻잔 속에는 맑고 투명하게 빛나는 황금빛 수색이 담깁니다.
- 향: 자스민 우롱의 향이 선명하고 진한 '진보라색'의 느낌이라면, 이 자스민 녹차는 은은하고 수줍은 '연보라색'이 떠오르는 향입니다. 녹차 특유의 부드러운 질감이 자스민의 화려함을 포근하게 감싸 안아주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 맛: 단맛(1), 쓴맛(0.5), 구수함(1)의 밸런스 속에 입안을 감도는 풍성한 감칠맛이 일품입니다.
- 질감: 혀끝에 닿는 느낌이 무척 매끄럽고 부드럽습니다.
자스민 녹차는 섬세한 아이입니다. 우려내는 시간이 조금만 길어져도 녹차 특유의 쓴맛이 금세 진해집니다. 물론 그 쌉싸름함이 자스민 향과 어우러져 묘한 매력을 주기도 하지만, 되도록 쓴맛을 줄이고 부드럽게 즐기시길 권합니다. 80도 정도의 적당한 온도에서 2~3분의 시간을 지켜 우려낸다면, 자스민 녹차가 가진 최상의 풍미를 만나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겨울잠에서 깨어난 만물이 기지개를 켜는 경칩, 그리고 그 활기를 이어받아 풍작을 기원하던 선농제의 마음까지 살펴보았습니다.
뜨끈한 설렁탕 한 그릇으로 몸의 기운을 돋우고, 연보라색 향기를 닮은 자스민 녹차 한 잔으로 마음의 창을 열어보시는 건 어떨까요? 변덕스러운 봄 날씨에 자칫 움츠러들기 쉬운 시기이지만, 향긋한 차 한 잔이 전하는 온기는 우리 몸속에 잠들어 있던 봄의 생동감을 기분 좋게 깨워줄 것입니다.
올해 경칩에는 자스민 녹차의 섬세한 향기처럼, 여러분의 일상에도 은은하고 기분 좋은 봄바람이 머물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따뜻한 차 한 잔과 함께, 활기찬 봄날 맞이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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