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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그리고 책, 문학, 예술

[시와 TEA] 류시화 시인의 겨울 시 모음 그리고 또하나의 시 홍차(다르즐링)

by HEEHEENE 2022. 12.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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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시화 시인의 작품은 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에서 시작해서 하늘호수로 떠난 여행, '사랑하라 한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 처럼' 같은 작품들을 접한 적이 있습니다. 무뚝뚝한 공대생이 중고등학교때 접한 국어와 문학 교과서의 시를 제외하고는 진심으로 시를 읽은 기억이 있는 책입니다. 운율이니 은유니 하며 외우지 못하면 혼나면서 접했던 시가 아닌 편하게 읽으면서도 감동을 주기 때문에 매력적인 시였습니다.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오랜 시간이 지나서 시를 다시 조금씩 읽으면서 류시화 시인의 시집을 집었습니다. 시집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는1991년에 출간한 첫번째 시집입니다. 

 

겨울의 구름들 - 류시화-

겨울의 구름들
-류시화-

1
겨울이 왔다
내 집 앞의 거리는 눈에 덮이고
헌 옷을 입은 자들이 지나간다
그들 중 두세 명을 나는 알고
더 많은 다른 얼굴들은 알지 못할 것 같다
나는 소리쳐 그들을 부른다 내 목소리는 
그곳까지 들리지 않는다
겨울은 저 아래 길에서 보이지 않는
그 무엇에 열중해 있는 것이다
2
겨울이 왔다
내 삶은 하찮은 것이었다
밤에는 다만 등불 아래서 책을 읽고 온갖
부질없이 기픈 생각들에 사로잡힐 때
늘어뜨려진 가지, 때아닌 붉은 열매들이
머리 위에서 창을 두드리고
나는 갈 곳이 없었다
희고 창백한 얼굴로 밖을 내다보면
겨울의 구름들이
붉은 잎들과 함께 어디론가 흘러가고 있었다
나는 내 집을 떠나지 않았다
나는 홀로 있었다 등불의 심지를 들여다 보며
변함없는 어떤 흐름이 답자기 멈춘 일은
이전에도 여러 번 있었다.

3
아니다, 그것이 아니었다
나는 책장에 얼굴을 묻고
잠이 들곤 했다. 겨울이 왔다
내 삶은 하찮은 것이었고
나는 오갈 데가 없었다
내 집 지붕 위로
겨울의 구름들이 흘러가는 곳
나는 침묵할 수밖에 없다
침묵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바람은 그렇게 오래 불고 조용히 속삭이며
더 큰 물결을 내 집 뒤로 데리고 온다

겨울하늘구름
겨울하늘구름

 류시화 시인의 시는 함축적이기 보다는 묘사적이고 서술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읽고 있으면 장면이 떠오릅니다. 물론 그 뜻을 모두 이해할 수 없는 점은 다른 시들과 비슷하지만 무언가 비슷한 그림을 그리고 그 그림의 모습이 나의 추억과 비슷한 점이 있는지 떠올리게 되는 것 같습니다.

차가운 공기에 괜실히 우울해진 생각들을 떨치고자 하늘을 바라보면 오랜만에 맑은 하늘에 흰구름들이 바람에 지나가고 있습니다. 

 

눈위에 쓴 시 -류시화-

눈 위에 쓴 시
-류시화-
누구는 종이 위에 시를 쓰고
누구는 사람 가슴에 시를 쓰고
누구는 자취없는 허공에 대고 시를 쓴다지만
나는 십이월의 눈 위에 시를 쓴다
눈이 녹아 버리면 흔적도 없이 사라질
나의 시

눈위 발자국
눈 위 발자국

눈 위에 쓴 시는 다른 시들과 비슷한 운율이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영원하기를 바라지 않지만 그래도 조금은 지속이 되었으면 하는 미련이 남은 어떤 단어, 말, 문장을 쓸 곳은 눈뿐이었나 봅니다. 올해는 아직 눈이 내리지 않았습니다만 

눈사람이나 눈위의 발자국은 사라지기 때문에 아름다워 보이는 면도 있는 것 같습니다.

 

겨울날의 동화 -류시화-

겨울날의 동화
-류시화-
1969년 겨울, 일월 십일 아침, 여덟시가 조금 지날
무렵이었다 그날은 내 생일이었다 그리고
마당 가득 눈이 내렸다
내가 아직 이불 속에 있는데
엄마가 나를 소리쳐 불렀다
눈이 이렇게 많이 왔는데 넌 아직도
잠만 자고 있니!나는 눈을 부비며 마당으로 나왔다
나는 이제 열 살이었다 버릇없는 새들이 담장위에서
내가 늦잠 잔 걸 갖고 입방아를 찧어댔다
외박 전문가인 지빠귀새는 내 눈길을 피하려고
일부러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눈은 이미 그쳤지만 신발과 지붕들이 눈에 덮여 있었다

나는 아무도 밟지 않은 눈 위를 걸어 집 뒤의
언덕으로 올라갔다 그곳에
붉은 열매들이 있었다 가시나무에 매달린 붉은 열매들
그때 내 발자국 소리를 듣고
가시나무에 앉은 텃새들이 비명을 질렀다
그 순간에는 미처 깨닫지 못했지만 그때 나는 갑자기
어떤 걸 알아 버렸다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어떤 것이 내 생각 속으로 들어왔다
내 삶을 지배하게 될 어떤 것이
작은 붉은 열매와도 같은 어떤 것이 나를
내 생각을 사로잡아 버렸다

그 후로 오랫동안
나는 겨울의 마른 열매들처럼
바람 하나에도 부스럭거렸다

언덕 위에서는 멀리 저수지가 보였다 저수지는 얼고 그 위에
하얗게 눈이 덮여 있었다
그때 누군가 소리쳤다
저 붉은 잎들 좀 봐. 바람에 날려가는! 저수지 위에 흩날리는
붉은 잎들! 흰 눈과 함께 붉은 잎들이
어디론가 날려가고 있었다 그것들은 그해 겨울의
마지막 남은 나뭇잎들이었다

쥐빠귀새
쥐빠귀새

'겨울날의 동화'는 시라기에는 일종의 수필처럼 느껴지는데요. 눈이 내린 생일날 늦잠에서 깬 10살밖이 류시화는 집뒤의 언덕으로 올라가며 새들과 마른 나무, 저수지에 쌓인 눈을 구경하는 모습입니다. 시간대별로 서술된 내용입니다.

그런데 눈으로 읽을 때는 모르겠는 점이 소리를 내서 읽으면 행과 행이 끊어진 부분이 약간 어색합니다. 말이 마치지 않을 때 행이 바꿔셔 조금 급하게 읽게 되는데요. 그래서인지 소리를 내서 읽으면 눈내린 생일날 아침 설래고 기쁜 마음으로 호흡과 심장이 바빠진 아이의 발그래한 볼따기 같은 심정으로 읽게 되는 것 같습니다.

화자에게 몰입이 되는 연출처럼 느껴지는 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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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차(류시화) 그리고 다르즐링 홍차

마지막으로 소개할 시는 겨울시는 아닙니다. 

시를 소개하면서 차도 한잔 소개하려는데, 마침 '홈차'라는 시가 있었습니다.

홍차
-류시화 -
당신은 홍차에 레몬 한조각을 넣고
나는 아무것도 넣지 않은 쌉싸름한 맛을 좋아했지
단순히 그 차이뿐
늦은 삼월생인 봄의 언저리에서 꽃들이
작년의 날짜를 계산하고 있을 때
당신은 이제 막 봄눈을 뜬 겨울잠쥐에 대해 말했고
나는 인도에서 겨울을 나는 흰꼬리딱새를 이야기했지
인도에서는 새들이 힌디어로 지저귄다고
쿠시 쿠시 쿠시 하고
아무도 모르는 신비의 시간 같은 것은 없었지
다만, 늦눈에 움마다 빰이 언 꽃나무 아래서
뜨거운 홍차를 마시며 당신은 둘이서 바닷가로 산책을갔는데 갑자기
번개가 쳤던 날 우리 이마를 따라다니던 비를 이야기하고
나는 까비 쿠시 카비 감이라는 인도 영화에 대해 말했지
때로는 행복하고 때로는 슬프고
망각의 이유를 물을 필요도 없이
언젠가 우리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새들이 날개로 하루를 성스럽게 하는 시간
다르질링 홍차를 마시며
당신이 내게 슬픔을 이야기하고
내가 그 슬품을 듣기도 했다는 것 어느 생에선가 한 번은 그랬었다는 것을
기억하겠지 당신 몸에 난 흉처를 만지는 것을
내가 좋아했다는 것을
흉터가 있다는 것은
상처를 견뎌냈다는 것
노랑지빠귀 우는 아침, 당신은 잠든 척하며
내가 깨워도 일어나지 않았지
그리고 어느 날엔가는 우리가 아주 잠들어 버리겠지
그저 당신의 찻잔에 남은 레몬 한조각과
내 빈 찻잔에 떨어지는 꽃잎 하나 단순히 그 차이 뿐
그라고는 이내 우리의 찻잔에서 나비가 날아올라
꽃나무들 속으로 들어가겠지.
날짜 계산을 잘못해 늦게 온
봄을 따끔하게 혼내는 찔레나무와
늦은 삼월생의 봄눈 속으로

(쿠시 행복, 까비 쿠시 까비감 -때로는 행복하고 때로는 슬프고)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시에서는 시인과 상대방이 있습니다. 시인은 그냥 홍차를 마시고 상대방은 레몬을 올려서 마십니다.

3월이고 그들은 다즐링 홍차를 마십니다.

누군가 저한테 그런 이야기를 하더군요 "아직 겨울이 오지도 않았는데 봄이 그립네요."

봄이 그리운 겨울에 마시는 다즐링은 

다즐링
다즐링 홍차

신선한 풀향에 레몬향이 상큼하니 더해지며 약간의 산미를 쌉쌀한 홍차에 녹아냅니다. 단맛이 적은 이 조합에는 구수함 산미 쓰고 떫음이 느껴집니다. 그래서 내 침생에서 나온 침이 오히려 달게 느겨집니다.
인도나 티벳에서는 고행을 통해 행복을 찾는 구도자들이 있다고 하는데, 달콤함은 나에게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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